정해신 박사의 [남자 대 남자]를 읽으며, 그의 글솜씨에 감탄했다.
아니 이건 ‘글솜씨’ 문제가 아니겠다. 본질을 뚫는 글을 본듯한 느낌이랄까..
특히 사람을 비교해 놓은 각 챕터 앞에 있는 문구들이 참 와닿았기에, 여기 옮겨본다.
# 내 맘대로 ‘왕자’, 니 맘대로 ‘독재자’
과연 내가 나를 가장 잘 알까? 어쩌면 이런 의문 자체가 시답지않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간혹 내가 잘 모르던 나의 모습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전체적으로 보자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일단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고 믿어버리면 결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나타난다. ‘내가 아는 나’와 ‘네가 아는 나’ 사이의 균형은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중요한 화두 아니겠는가.
# ‘나’로부터의 도피, ‘나’를 향한 일탈
‘자유’라는 단어만큼 끊임없이 마음을 두드리는 말도 없을 것이다. 때때로 막연하게 터져나오는 “아, 자유롭고 싶다”. 하지만 자유는 늘 그 ‘막연함’ 속에만 존재한다. 자유는 단지 잠시 동안의 휴식으로 여겨지거나 혹은 방탕함과 같은 부정적 가치로 인식된다. 현실에는 늘 ㅂ다 높은 가치가 존재하며, 자유는 단지 그 가치를 더욱 빛내기 위해 억제되는 조연의 역할에 머무른다. 그렇다면 자유를 억누른 대가로 당신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
# ‘마당발’의 닫힌 연대, ‘단독자’의 열린 고립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여기저기 쉽사리 도움을 얻는 사람은 인간성이 좋다거나 사회생활을 제대로 했다는 평가를 받는 반면, 그 반대 경우엔 거의 낙오자 취급을 받는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별 이의없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소위 ‘마당발’은 그 자체로 가장 중요한 사회적 ‘능력’이며, 고립된 사람은 제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성공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런 인간 네트워크의 가치란 도대체 무엇일까? 과연 ‘참 나’를 버리고라도 반드시 얻어야 할 만큼 그렇게 값진 것일까?
# 일상과 직업의 황금비
밥 위에 카레를 끼얹어 먹을 때 카레를 끼얹은 부분이 5, 흰밥이 보이는 부분이 3일 때 카레라이스의 맛이 가장 좋게 느껴진다고 한다. 미술에서도 5대 3의 비율은 황금비라 부른다. 사람은 이 구도에서 가장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일과 삶에 있어서도 이 원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다만 무엇이 5가 되고 무엇이 3이 되어야 황금비가 되느냐에 관한 선택권은 전적으로 당사자에게 있다.# ‘칼’의 이회창, ‘저울’의 이회창
때로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혼란스러울 만큼 극단적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단순히 평가가 아니라 정말 극단적인 두 모습이 한 사람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는 경우라면 혼란은 더욱 가중된다. 하지만 진짜로 혼란스러운 사람은 평가의 대상이 된 그 자신이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항상 일관되게 행동해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내 안의 또다른 나’. 자, 당신은 ‘당신 안의 또다른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남자 vs 남자 / 정해신]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