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책장에서 ‘상실의 시대’를 뽑아든건 왜였는지 모르겠다.
대학교 재학시절, 꼭 읽어야한다는 어떤 압박감 때문에 대충 한번 훑듯 읽은 것 외에는 이 책을 딱히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런데 문득 이 책에 손이 간 것은 아마도 내가 좀 ‘사색적인 성장 소설’을 읽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원래 성장 드라마·성장 소설 등을 좋아하는 편이고, 요즘 나 역시도 ‘성장’이란걸 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몇년만에 읽는 ‘상실의 시대’는…. 사실….. 음…… 별로였다.
사실 이 책 예찬론자가 많기에 이렇게까지 표현하기는 좀 주저하게 되나, 내 느낌은 어쨌든 그랬다.
이책의 ‘1인칭 주인공 시점’이 매우 싫었다.
성장하는 한 남자. 17~20살 사이의 그는 너무나 오만하다. 대학 캠퍼스에서 흔히 볼 수있는, 노을지는 벤치에 앉아 온갖 삼라만상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자신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존재인양 하는… ‘넌 이런 나를 이해 못해’라는 표정과 잰 체하는 말투를 지닌 그런 사람이 생각났다. 자신만이 어떤 의미에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생의 이면’을 읽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자신이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한다거나, 가족이나 애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독자에게까지 강요하는 것 같아 기분이 별로였다. 그래서 앞으로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책을 읽을 때 좀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문학적 가치를 놓고 보자면 꽤 괜찮은 책이다.
스토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내용 전반에 여러가지 다른 문학작품 및 예술의 코드가 녹아있고, 이 책의 코드를 다른 책이나 예술, 영화에서도 차용하고 있다는 점 등이 매우 흥미로웠다.
또 ‘모든 정상인이 모든 비정상인일 수 있다’는 명제(?)를 다시한번 깨닫게 해주어 나에겐 작은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의 ‘남자의 시선’은 역겨웠다. 특히 ‘나가사’라고 불리는 그 선배가 무척 싫었다. 넘 뻔뻔하달까? 그래도 그건 내 개인취향이니까 넘어가주자.
나가사와 와타나베가 술집에서 여자를 헌팅할 때, 그냥 말 좀 잘하고 말쑥하게 차려입으면 어느 여자와 잘 수 있다는 것도 싫었고, 그 여자들과의 ‘사랑’ 혹은 더 친밀한 관계로의 발전는 고려(?)도 해보지 않은 채, 각자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참한 여자와의 관계에서만 ‘사랑’ 혹은 ‘관계의 발전’만 생각한다는게 우스웠다.
‘나가사’는 사랑할 가치가 없는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만을 열렬히 사랑한 하쯔미. 그래서 결국 그와의 헤어짐 후에 자살까지 생각하게 된다는 그 스토리가 역겨웠고, 미도리가 와타나베에게 호의가 있어 접근한 것임을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했던 와타나베가 유치해보였다. 이 책 말미에까지 그는 이를 모른 척 한다. 정말 몰랐다면 바보 아냐? (이책에서 미도리의 말을 빌리면 ‘험프리 보가트’적일 수도 있겠지만, 난 그 사람은 잘 모르며, 잘난 척 한다거나 터프(?)한 척 하는 것을 멋있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기에 패스.)
그리고 이 책에는 ‘죽음’이 너무 많이 나와서 싫었다…
뭐.. 이는 나의 투덜거림일 뿐… 사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이 불만이 있었던건 아니다 ;;;
아래는 무척 와닿았던 부분을 옮겨적었다.
어느 날 담당 의사에게 그 말을 했더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옳다고 했어. 그는 우리들이 이곳에 와 있는 건, 그 비뚤어진 것을 교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비뚤어짐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라고 했지. 우리들의 문제점 중 하나는, 그 비뚤어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 있다는 거야.
각기 사람마다 걸음걸이에 버릇이 있듯이 느끼는 방식이나 사고 방식, 사물에 대한 견해에도 버릇이 있고, 그것은 고치려 해도 갑자기 고쳐지는 것이 아니며, 무리하게 고치려 들면 다른 데가 이상해진다는 거야.
(중략)
“그런데 왜 넌 그런 사람들만 좋아하는 거야? 하고 나오코가 말했다. “우린 모두 어딘가 휘어지고, 비뚤어지고, 헤엄을 못 쳐서 자꾸만 물 속에 빠져 들어가기만 하는 인간들이야. 나도 기즈키도 레이코 언니도, 모두 그래. 어째서 좀더 정상적인 사람을 좋아하지 못하는 거야?”
“그건, 내겐 그렇게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야.” 나는 잠시 생각하고 나서 그렇게 대답했다.
“나오코나 기즈키, 레이코 씨가 어딘지 비뚤어져 있다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거든, 내가 생각하는 어딘가 비뚤어진 사람들은 다들 힘차게 바깥 세상을 활보하고 있어.”- 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